프랑스 혁명, 혁명을 생각하다.





 프랑스 혁명, 혁명을 생각하다.

프랑스 역사를 읽어내는 게, 스땅달이나 빅토르 위고, 혹은 에릭 홉스봄이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남장여자를 한 오스칼이 멋있는 [베르사유의 장미]였으며, 그는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동경을 마리 앙투와네트(Maria Antonia Anna Josepha Joanna. 1755-1793.10.16)에 투사했다. 왕비는 언제나 청순가련한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이였으며, 혁명기를 짧게 살다간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1758-1794.07.28)에게는 공포정치를 주도한 악인으로 생각했었다. 

즉, 베르사유에 대한 진실은 일본인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유의 장미]였으며, 세계사 공부 시간에 선생님께서 소품으로 들려준 마리 앙뜨와네트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였으며, 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이 빵을 요구하자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지’라는 역사적 허구성과 소문이였다. 7월의 프랑스 혁명은, 혁명의 한 가운데에 청순 가련하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한 여인(女人)을 들러리로 내세웠으며, 혁명에 대한 진지한 평가를 하려 하면 로베스피에르를 내세워 혁명의 불완전성을 필연적 역사로 귀결시키려 했다. 

그는 우연찮게 파리에서 한 달을 머무르게 되면서, 루브르 박물관(Musee du Louvre)을 구경하고 베르샤유 궁전(Chateau de Versailles)을 다녀오고, 상젤리제를 다시 걸었다.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우습게도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일본 만화 영화]였다는 점에서 얼마간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는 이국(異國)의 역사문화를 타국(他國)의 작가적 시선을 통해 걸려지고 있음에 슬프진다. 분명 그의 발걸음은, 그의 눈(目)으로 통해 이국의 역사문화를 읽어내고 싶은 마음에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 길 위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서툴지만, 그러나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니 나아가려 한다. 


태양왕이라 불리우는 루이 14세는 파리에서 얼마간 떨어진 허허벌판에 ‘고유한 자부심, 자기를 신격화’하려는 의지에 의해 베르사유 궁전을 세웠다. 왕은 궁전과 정원을 만들고, 인공 폭포와 동굴을 만들었다. “민중은 아무것도 아니고 국왕이 전부임을 프랑스에 보여주기 위해서 베르샤유는 축조(49쪽)”되었다. 하지만 베르사유는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 변절되었으며, 소심하고 내성적인 혹은 사냥을 즐기는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1.21)와 오스트리아의 철부지 소녀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를 맞이함으로써 그 색은 퇴색되었다. 더 이상 ‘궁전’은 민중 위에서 군림하는 게 아니라 민중과 떨어진 체 파리의 귀부인들의 화려한 만찬의 식탁이 되었으며, 왕비의 유행은 파리 귀부인들의 유행을 주도하게 되었다. 궁전은 ‘프랑스의 구심점’이 아니라 귀부인들의 ‘가장무도회’장으로 타락하고 있었다.

1776년과 1777년의 카니발에서 왕비는 ‘경마, 오페라의 극장 무도회, 가장 무도회’에 빠지는 경우가 없었으며, ‘동이 트기 전에 귀가하는 적도 없었다’ 이미 루이 15세(Louis XV, 1710-1774.5.10)는 베르사유에 없었고, 왕비는 베르사유에 머무르지 않아도 되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가 실질적으로 베르사유의 왕비였으며, 파리의 왕비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베르사유는 ‘신격화 할 성(城이 아니라 ‘고독한 섬(島)’이였는지 모른다. 이런 왕비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메르시 대사의 보고는 절망이였는지 모른다

“왕비 마마께서는 외적인 품위를 완전히 잃으셨습니다(158쪽)”

1787년과 1788년의 두 해에 걸친 흉작은 밀 가격의 앙등을 가져왔고, 도시 빈민들의 먹거리를 뺏어갔다. 루이 16세는 이 경제적 위기의 해법을 차지 못했으며, 1614년 이후 한번도 소집된 적이 없는 삼부회를 베르사유로 부르고 만다.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그리고 제3신분(부르주아와 농민)을 일컬으며, 베르사유에 모인 제3신분들은 그네들의 불만을 작성하여 보고했다. 국민의회로 바꿔진 삼부회는, 미라보 등의 급직적인 개혁자들의 의해 ‘파리의 실업과 물가앙등, 위협적인 식량 부족 사태, 그리고 기근 등에 의해서 촉발된 분노와 좌절이 폭력시위로 이어졌으며, 이것은 1789년 7월 14일에 절정에 달했다(301쪽)”

군중들은 국왕과 귀족들의 개혁에 대한 반대를 우려하여, ‘진짜 무기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했으며, 그곳의 수감자들도 풀어주었다. 다음날 국왕은 군중들이 내민, 삼색기(왕정의 상징이 흰색과 파리의 상징인 청색과 적색)를 받아들인다. 이로써 왕은 군중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의회는 한 달 뒤, 1789년 8월 4일에 구체제(Ancien Regime)를 소멸시켰으며,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한다. 1791년에는 국왕을 ‘입헌군주’로 전락시켰으며, 더 이상 ‘신성(神聖)’은 사라져버렸다. 

‘루이16세는 자신의 옛 특권들을 회복하는 수단을, 그리고 공화주의자들은 왕의 배신을 폭로하고 그를 제거할 기회를 각각 전쟁’에서 찾았으며, 이는 1792년 4월 20일에 1815년까지 될 비극이 시작된다. 프로이센은 분명 프랑스의 몰락을 곁눈질하며 즐기고 있었는데, 어느 시점에 다다르자 프랑스를 무력화시키려 했다. 이에 국민의회는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다(1792년 7월 10일)”고 선언했으며, 이에 ‘프랑스의 방위를 혁명이념의 수호와 동일시하는 자원병들’이 몰려들었다. 1793년 1월에는, ‘왕권에 대한 복권’을 두려워한 혁명은 루이 16세를 처형시킨다. 그는 죽기 전에 “나는 죄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말한 의미는 무엇이였을까? 1년 전에 있은 ‘브라운슈바이크의 선언’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루이 15세로 물려받은 피(血)로 인해 왕위에 오른 것을 말하는 것일까?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은 프랑스라는 나라를, 근대라는 역사를 이끌고 가기에는 역부족이였는지 모른다. 국왕의 처형은 유럽 왕실들을 불쾌하게 했으며, 이어 ‘제1차 대불동맹전쟁(對佛大同盟戰爭)’을 불러일으킨다.

1793년 프랑스 파리의 혼란은 가중 되었으며,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 1743-1793)와 조르주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1794)의 죽음, 이후 산악파(Montagnards, 山嶽派)의 살아있는 -‘청렴결백한 남자’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1758-1794)의 독재, 공포정치가 서막을 올렸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등장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 또한 기요틴(Guilotine) 아래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테르미도르 (Thermidor) 반동’으로 인해 프랑스는 혁명에서 한 발 주춤하게 된다. 그리고 혁명을 이을 또 한 사람이 포병으로서 그 활약을 들어내기 시작했으며, 그는 키 작은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1769-1821)이다.

언어가 시험 과목이 되어서는 아니되 듯, 역사 또한 이와 같다. 어떤 해(年)에 무슨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는가를 '단순 사실'을 기억시키고 점수를 부여하는 것은 의미 없는 행위일런지 모른다.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에 따른 원인과 결과, 그 행위에 대한 과정을 이해하고 성찰하여 오늘날에 비판적 수용으로 이어져, 내일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함이다. 

이제까지 그에게, 프랑스 혁명을 이야기 할 적에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은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으며, '마리 앙뜨와네트'를 떠올리는 것은 비극적 소설 속의 여주인공 이름 하나 외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정규 교과 과정을 졸업하고, 열 다섯 해가 지난 어느 날에, '베르사유 궁전'을 둘러보고, 파리 시내를 걸으면서 그는 무척이나 아파온다. 그는 혁명을 이야기 할 수 없었으며, 혁명을 더 이상 꿈꾸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베르사유를 다녀오고 난 뒤에는 민박집에서 방 청소를 하며, 뒤뜰에 빨래를 널며, 텃밭에 물을 주며, 혹은 어제 사놓은 싸구려 와인을 놓고서는 홀로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소르본 대학을 걸으며, 미라보 다리를 건너며, 상젤리제 거리를 걸으며 그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파리에서 한 달을 머무르며 무엇을 보았느냐? 무엇을 꿈꾸었느냐?”

프랑스의 혁명은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인해, 보수로 회귀하였으며 나폴레옹으로 인해 주변국은 각성을 꾀하게 되었다. 하지만 파리의 혁명은 도시의 경계를, 국가의 경계를 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슬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 이전에 종교 개혁은 분명 국경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근대에 이르러 68혁명(1968年)은 ‘신좌파의 상상력’을 통해 전지구적인(-지극히 유럽과 미국)와 혁명으로 전이되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튀니지(Tunisia)의 재스민(Jasmine)혁명은 인접국인 리비아와 이집트 그리고 중동으로 전이되곤 했다. 어쩌면 혁명은 전염성이 강한 감기일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혁명(革命)을 믿는다. 

* 참고서적 *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청미래出. 박광자譯 2005)
[새유럽의 역사] 프레데리크 들루슈 (까치出. 윤승준譯 1995)
[신좌파의 상상력] 조지 카치아피카스 (이후出. 이재원譯 2009)




내 사춘기 시절의 여자주인공 [마리 앙뜨와네뜨]와 그의 가족들.

"불행해지면 불행해질수록 진실한 친구에게 마음속 깊은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

그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너무나 청순했으며, 너무나 겉치레에 온몸을 치장했다. 
그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내면으로 돌아섰을 때, 이미 역사는 그를 앞서 있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외면의 그를, 여행자인 오늘에는 내면의 그를 마주한다.




그리고, 내 사춘기 시절의 또 한 명의 혁명 영웅. 과연 그는 오늘날에도 나에게 영웅인가? 침탈자인가? 
프라도 미술관에서 본,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는 나를, 그를 의심케 했다.
다시 그를, 나 만의 시선으로 마주해야 한다.





"내가 가난을 보고서 자비를 품지 못하면, 내 마음 속에 사랑이 없음이요.
 내가 부패를 보고서 혁명을 꿈꾸지 못하면, 내 가슴 속에 열정이 없음이다."